카를 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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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 정치인이자 법학자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반전 운동을 전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후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레너는 1945년 오스트리아가 해방된 후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50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는 법 사회학 분야의 선구자였으며,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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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레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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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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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 레너 |
출생일 | 1870년 12월 14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운터-타노비츠 (현재 체코, 돌니 두나요비체) |
사망일 | 1950년 12월 31일 (향년 80세) |
사망지 | 오스트리아, 빈 |
소속 정당 |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
배우자 | 루이제 레너 |
직업 | 법률가 |
정치 경력 | |
오스트리아 대통령 | 임기 시작: 1945년 12월 20일 임기 종료: 1950년 12월 31일 총리: 레오폴트 피글 전임: 빌헬름 미클라스 (1938년) 후임: 테오도어 쾨르너 |
오스트리아 총리 | 임기 시작: 1945년 4월 27일 임기 종료: 1945년 12월 20일 대통령: (해당 없음) 부총리: 레오폴트 피글, 요한 코플레니히, 아돌프 셰르프 전임: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1938년) 후임: 레오폴트 피글 |
부총리 | 임기 시작: 1919년 10월 21일 임기 종료: 1920년 7월 7일 부총리: 요도크 핑크 전임: 본인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 총리) 후임: 미하엘 마이어 |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 총리 | 임기 시작: 1918년 10월 30일 임기 종료: 1919년 10월 21일 임명권자: 국가 평의회 부총리: 요도크 핑크 전임: 신설 후임: 본인 (오스트리아 총리) |
국민의회 의장 | 임기 시작: 1931년 4월 29일 임기 종료: 1933년 3월 4일 전임: 마티아스 엘더슈 후임: 레오폴트 쿤샤크 (1945년) |
내무 및 교육부 장관 | 임기 시작: 1919년 3월 15일 임기 종료: 1919년 5월 9일 전임: 하인리히 마타야 (내무), 라파엘 파허 (교육) 후임: 마티아스 엘더슈 |
외무부 장관 | 임기 시작: 1919년 7월 26일 임기 종료: 1920년 10월 22일 전임: 오토 바우어 후임: 미하엘 마이어 |
2. 젊은 시절
레너는 영세한 농부의 18번째 아이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정진했다. 대가족이라 부모의 관심은 적었지만 누나의 보살핌을 받았고, 집안이 파산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덕분에 20살에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김나지움에서 빌헬름 예루살렘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협조의 중요성을 배웠다. 1890년부터 1896년까지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23]
1896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에 입당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 1907년 국가평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1918년 해산될 때까지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오토 바우어 등과 함께 당 기관지 ''데어 캄프''를 창간하고 편집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에는 전쟁을 지지했으나, 이후 오토 바우어 등의 영향으로 반전 입장으로 선회했다.
1895년 자연의 벗들 기구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며 로고를 만들었다. 정치에 흥미를 느껴 의회 사서로 일하며 민법, 법제사, 민족 문제 등에 관한 저작을 발표했다. 오토 바우어,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등과 함께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23]
3. 정치 경력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후 초대 총리로 선출되어 생제르맹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과의 합병이 금지되었지만, 레너는 도나우 연방 구상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활로를 모색했다. 내정에서는 노동·복지 입법 강화와 의회제 민주주의 확립에 힘썼으며, 1920년에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오토 바우어를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당 내 좌파와의 갈등, 기독교사회당과의 대립 심화 등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 국민의회 의장에 취임했으나, 1933년 의회 기능 정지로 사임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 이후에는 투옥되기도 했다.
나치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레너는 독일과의 병합을 용인하는 견해를 발표하여 논란을 일으켰다.[24]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임시 정부 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45년 12월 20일 오스트리아 의회는 대통령제를 복원하고 만장일치로 레너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896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에 입당하여, 1907년 선거에서 니더외스터라이히주에서 출마해 당선되었고,[1] 이후 국가평의회에서 당을 대표했다. 1911년 소비자협동조합 전국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노동자를 위한 은행 창설, 식료 공급 등에 힘썼다.[2] 오토 바우어와 함께 사회민주당 기관지 ''데어 캄프''(Der Kampf)를 창간하고 편집했다.[3]
레너는 '국가평의회' 사서로 일하면서 다양한 필명('''Synopticus''', '''Rudolf Springer''')을 사용하여 법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전시켰다. 이는 국회의원 사서라는 직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2] 오스트리아 국가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지리적, 경제적, 정치적 근거를 들어 그 존재를 정당화했다.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초국가적 국가가 발전해야 하는 기반인 "개인 자치"를 옹호하여 사회민주당 의제와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3. 2. 제1차 세계 대전과 제1공화국 시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레너는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지지했다.[24] 그러나 오토 바우어에게 설득되어 프리드리히 아들러와 함께 반전 운동을 전개했다. 전후 오스트리아의 방향에 대해 도나우 연방을 제창했으나, 민족 자결에 따른 독일과의 합병을 주장한 의견에 패배하여 사회민주당의 주류는 우파에서 좌파로 바뀌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비독일계 민족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했다.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은 정권을 담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제정이 붕괴한 뒤 출범한 공화국의 주도권은 사회민주당이 쥐게 되었고, 레너가 초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레너는 새로운 국가를 위해 거의 같은 지역에 위치했고 로마 제국의 한 주로서 병합되었던 고대 켈트 왕국 "노리쿰"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명칭인 "북방 공화국"(Norische Republikde, Noric Republic영어)을 제안했다. 이후 "독일계 오스트리아"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부로 한다는 빈 제헌의회의 결의와 함께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k Deutsch-Österreichde)으로 가결되었다. 심지어 제국이 몰락하기 전에도 레너는 오스트리아를 미래 독일 연합의 일부로 하자고 제의하면서 "오스트리아 병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24]
하지만 이 국명은 다음 해 연합국과 강화 조약을 맺으면서 독일과의 합병 금지를 강요당하면서 좌절되었다. 외무장관이던 바우어는 여기에 강력히 반대하며 사표를 던졌지만, 레너는 도나우 연방 구상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생제르맹 조약 협상에서 레너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인정받았지만, 제국 오스트리아의 후계자로 선언되었다. 레너는 이 새로운 오스트리아가 독일과의 어떠한 정치적 연합도 금지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남티롤, 보헤미아, 모라비아의 독일어 사용 지역 상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내정에 있어서 레너는 노동 및 복지 분야의 입법을 충실히 시행했으며, 기독사회당과 연립 정권을 협조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0년에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했다. 레너 정부는 실업 보험, 유급 휴가, 8시간 노동, 광부, 제빵사, 여성 및 어린이의 근로 조건에 대한 규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도입했다. 장애인을 위한 국가 지원과 공무원을 위한 건강 보험도 제공되었으며, 단체 교섭과 분쟁 조정을 위한 법률도 통과되었다.[6]
그러나 당내에서 급속히 지도적 지위를 확립한 바우어를 추종하는 좌파 세력과의 의견 대립이 잇따랐다. 레너는 사회주의자임에도 자본주의의 사회화를 주장하고 민주주의를 긍정하고 독재에 반대하는 등 우파적 요소가 강했다. 반면 바우어는 사회주의가 역사의 필연이자 최종적 형태라며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레너는 바우어와의 의견 대립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1930년 세계 대공황의 혼란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의회 제1당의 지위를 회복했고, 다음 해 레너는 국민의회 의장으로 취임했다.[7] 하지만 양대 정당의 대립, 호국단의 의회 진출 등으로 의회 운영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933년 3월, 실의에 빠진 레너는 의장직을 사임했고, 기독사회당 출신 수상인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켜 버렸다.
3. 3. 오스트로파시즘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에서 정부가 승리하고 사회민주당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오토 바우어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했고, 레너는 100일 간 투옥되었다.[24] 석방 후 레너는 은거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로파시즘이 횡행한 가운데 나치 독일에 합병되었다.
레너는 나치의 정치 노선을 비판하면서도 독일과의 합병을 용인하는 견해를 발표했다.[24] 레너의 주장은 기존 사민당의 공식 견해와 일치했으나 나치의 통치 하에서 발표가 이루어졌기에 국내외에서 레너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24] 따라서 일설에는 레너가 투옥된 사민당원의 석방을 조건으로 합병을 옹호했다는 주장도 있다.[24] 하지만 이후 레너가 주장한 도나우 연방에 반하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이 있었을 때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자신의 정치적 좌절과 현 상황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4] 1938년 4월 2일, 레너는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안슐루스를 합법화하는 4월 10일 국민투표에서 "예"라고 투표할 것을 호소했고,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이 그의 조언을 따랐으며, 그 결과 오스트리아인들은 독일인과 히틀러를 환영했다.[8] 안슐루스 이후 레너는 점령 기간 동안 나치 정부에서 봉사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의 제안은 거절되었다.[9]
이 시기 레너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 은거 생활은 이후 부활의 열쇠가 된다.
3.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4월,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독일과 마찬가지로 수도 빈을 포함한 동부는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티롤 주, 잘츠부르크 주, 오버외스터라이히 주는 미국에, 포어아를베르크 주는 프랑스에, 케른텐 주는 영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10] 소련군 점령하에 있던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그로그니츠에 살고 있던 레너는 소련군에 초청되어 신정부 수립을 요청받았다.[11]
레너는 레닌과 스탈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 좌파 진영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였고(라이벌인 바우어는 망명지에서 사망), 정치적으로는 과거 "오스트리아 병합 지지 발언"이 약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소련은 본격적인 "친소련 정권"을 수립하기 전까지의 괴뢰 정권 수반으로 레너를 최적의 인물로 생각했다.[11] 레너는 이러한 소련의 의중을 알고 있었지만, 나치 지배를 거쳐 "독일과의 통일"이 환상임을 깨달은 오스트리아 국민을 위해 신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빈에 들어간 레너는 돌푸스에 의해 폐지되기 전 '''마지막 국민의회 의장의 자격'''으로, 사회민주당의 후신인 오스트리아 사회당, 기독교 사회당의 후신인 오스트리아 국민당, 오스트리아 공산당 대표와 회담하여 3당 연합 정권 수립을 계획했다. 4월 27일 임시 내각이 수립되었고, 이틀 뒤 "독립 선언"(돌푸스 정권 이전 헌법 부활)을 했다.[14] 이 정권은 사회당(레너 포함)과 국민당에 각각 3명, 공산당과 무소속에 각각 2명의 각료를 배분했으며, 장관과 다른 당파 출신 차관 2명이 장관의 권한을 견제하는 방침을 채택했다.
하지만, 구 기독교 사회당의 기반이었던 농촌 지역과 이 지역을 점령하는 소련 이외의 연합국은 레너 정권을 "소련의 괴뢰 정권"이라고 단정하고 승인을 거부했다.[14] 한편, 공산당은 소련군의 지원을 바탕으로 사회당에 "인민 블록" 결성을 호소했고, 사회당 좌파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국내 행정·경제 시스템은 마비 상태였으며, 소련과 미국의 "냉전" 조짐은 오스트리아를 병합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레너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타고난 관용과 낙천성으로, 레너는 이를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9월, 빈에 미·영·프군이 진주하여 "오스트리아 동서 분할" 소문이 떠돌 무렵, 레너는 전국 각 주의 대표를 모아 향후 오스트리아 방침을 정하는 "주 회의" 개최를 점령 4개국과 각 주에 제안했다. 그는 미·영·프에 대해 회의 성공 여부에 따라 자유로운 민의로 공산당을 정권에서 배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시사했다. 한편, 소련에 대해서는 회의가 열리지 않으면 다른 3개국이 회의를 열어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오스트리아 지도자를 선출하고, 오스트리아는 동서 분열 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9월 24일 빈에서 주 회의가 열렸고, 레너는 의장으로서 주 대표와 끈질긴 교섭 끝에 본격적인 정부 수립에 대한 합의를 얻었다.
10월 24일, 연합국은 레너를 오스트리아 정부 대표로 정식 인정했고, 11월 25일 전후 첫 총선을 실시했다. 미국은 레너가 소련의 "예스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유 선거 실시를 지원했기에, 총선은 소련 측의 방해 없이 치러졌다. 그 결과, 국민당이 근소한 차이로 사회당을 제치고 제1당이 되었으며, 공산당은 예상 밖의 참패를 겪었다. 이는 소련군의 약탈 행위와 과도한 배상 요구가 국민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수상 후임으로 국민당의 레오폴트 피글이 취임했다.
1945년 12월 20일, 재건된 오스트리아 의회는 대통령제 부활을 정식 결정하고, 만장일치로 레너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17] 레너는 대통령 재임 중이던 1950년 빈에서 사망했고, 빈 중앙 묘지에 매장되었다.
4. 사상과 유산
레너는 법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Rechtsinstitute des Privatrechts und ihre soziale Funktion. Ein Beitrag zur Kritik des bürgerlichen Rechts|사법 제도와 사회적 기능de(1904)을 통해 사법 제도의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공법과 사법의 분리는 자본주의의 창조물이며, 국가는 자본 소유자의 이익을 강요한다고 주장했다.[21]
민족 문제에 대해 그는 초국가적 국가가 발전해야 하는 기반인 "개인 자치"를 옹호했으며, 이를 통해 사회민주당의 의제와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3] 이론가로서 그는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3] 그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중앙집권·절대주의적인 정치 시스템으로는 여러 민족의 불만을 억누를 수 없다고 보았다. 거주 지역과는 별도로 "민족 공동체"를 결성하여 교육과 문화 등은 민족 공동체가 다루고, 개인은 "지역"과 "민족"의 두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부정하면서도, 국제 개혁을 통해 여러 민족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연방 국가 "도나우 연방"으로 개편하여 국가 체제의 붕괴를 피하려는 시도였으며, '''이원 연방 이론'''이라고 불렸다.
그와 오토 바우어의 문화적 소수자 법적 보호에 대한 아이디어는 유대인 분트에 의해 받아들여졌지만,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요제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에서 민족적 인적 자치를 비판하는 데 한 장을 할애했다.[22]
유럽 칼리지의 1977-1978학년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반유대주의 논란
카를 레너는 당내에서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강제 수용소 생존자이자 잘츠부르크 유대인 공동체 회장이었던 마르코 페잉골트는 201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18][19][20] "제2공화국의 초대 연방 대통령이었던 카를 레너는 당내에서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후 우리 수용소 생존자들이 빈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스트리아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6. 저작
레너는 의회 사서로 일하면서 민법, 법제사, 민족 문제 등에 관한 다양한 저작을 발표했다.[23] 그는 국제 분쟁과 사법 분석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으며, 자신의 혁신적인 생각을 필명으로 발표하여 의회 사서 자리를 유지했다.[23]
레너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저자 (필명) | 제목 (원제) | 한국어 번역 |
---|---|---|---|
1899 | 신옵티쿠스 | Staat und Nationde | 국가와 민족 |
1902 | 루돌프 슈프링어 | Der Kampf der oesterreichischen Nationen um den Staatde | 국가를 위한 오스트리아 민족들의 투쟁 |
1904 | 요제프 카르너 | Die Soziale Funktion der Rechtsinstitutede | 법 제도의 사회적 기능 |
1904 | Grundlagen und Entwicklungsziele der österreichischen-ungarischen Monarchie, die Krise des Dualismusde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기초와 발전 목표: 이중주의의 위기 | |
1916/17 | Österreichs Erneuerungde | 오스트리아의 갱신 | |
1918 | Marxismus, Krieg und Internationalede | 마르크스주의, 전쟁, 인터내셔널 | |
1924 | Die Wirtschaft als Gesamtprozess und die Sozialisierungde | 통합된 과정으로서의 경제와 사회화 | |
1929 | Staatswirtschaft, Weltwirtschaft und Sozialismusde | 국가 경제, 세계 경제와 사회주의 | |
1929 | Die Rechtsinstitute des Privatrechts und ihre soziale Funktionde | 사법 제도의 사회적 기능 | |
1929 | Wege der Verwirklichungde | 실현의 길 | |
1946 | An der Wende zweier Zeiten. Lebenserinnerungende | 두 시대의 전환점에서: 삶의 회고록 | |
1947 | Wandlungen der modernen Gesellschaftde | 현대 사회의 변혁 | |
1947 | Hundert Jahre Karl Marx: Erbe und Auftragde | 칼 마르크스 100주년: 유산과 과제 | |
1950 | Arbeit und Kapitalde | 노동과 자본 | |
1953 | Porträt einer Evolutionde | 진화의 초상 |
참조
[1]
논문
Book review
[2]
서적
Karl Renner: The Austro-Marxist as Concili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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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행물
Renner, Karl
Cite EB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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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in Deutscher Traum: die Anschlussidee und Anschlusspolitik bei Karl Renner und Otto Bauer. Materialien zur Arbeiterbewe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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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Karl Renner
[6]
서적
Austria-Hungary & the Successor States: A Reference Guide from the Renaissance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Info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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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Präsidentinnen und Präsidenten seit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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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Opinion | Austria Welcomed Hitler, and Its Anti-Semitism Persists
https://www.nytimes.[...]
198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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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Karl Re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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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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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Interview with Marko Feingold
https://www.kron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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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große Abneigung. Wie antisemitisch ist Österreich? Kritische Befunde zu einer sozialen Krankheit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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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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